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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술술

한국 위스키 역사는 88올림픽이 바꿨다? 한국인은 언제부터 위스키를 마셨을까? -1

by Jayden1983 2024. 4. 30.

스코틀랜드 스페이스사이드에 있는 벤로막 증류소 아시죠? 여기서 몇 년 전부터 한국 시장만을 위한 위스키를 내놓고 있는데 이 스페셜 에디션의 이름이 유사길이에요. 병에 아예 유사길이라고 적어 놨는데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에 위스키 같은 서양 술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때 위스키를 뭐라고 적을까 하다가 비슷한 발음에 한자를 조합해서 유사길이라고 적었던 건데요. 다른 서양 술도 비슷했어요. 1883년 한성순보를 보면, 브랜디는 '박란덕', 샴페인은 '상백윤'이라고 적혀 있는데, 제일 특이한 건 복이탈이었어요. 바로 보르도 와인을 그때는 저렇게 표기했어요. 어쨌든 유사길이라는 이름으로 개화기 조선에 소개된 위스키, 이후 대한제국 시기(1897~1910)에는 황실 연회에 자주 등장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국립 중앙도서관 아카이브를 뒤져보니까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황성신문에 고종황제의 후궁이었던 엄귀비가 당시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한테 다른 서양 술과 함께 위스키를 2, 24병이나 선물했다는 기록도 있더라고요. 이걸 보면 대한제국 황실에서 얼마나 많은 위스키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이 되는데, 이때는 유사길이 아니라 우이스키라 표기된 점도 눈에 띕니다.

 

한국도 이제 명실상부한 위스키 생산국이죠. 기원 위스키 만드는 쓰리소사이어티스도 있고, 김창수 위스키도 있고, 롯데에서도 지금 증류소 준비 중이니까요. 그렇다면 서양 술인 위스키, 한국에서 어떻게 퍼져 나가게 됐고 한국은 대체 언제부터 위스키라는 이름의 술을 만들었던 걸까요? 이런 궁금증 풀어드리기 위해서 오늘은 대한민국 위스키 역사를 시대별로 모두 정리해보겠습니다.

 

혹시 이런 사진 보신 적 있으세요? 갓을 쓴 양반이 개다리소반 앞에 앉아 술을 받아먹고 있는 모습인데요. 소반에 놓인 유리병 때문에 이 사진은 구한말에 양반이 위스키를 즐기는 모습으로 소개돼 왔어요. 하지만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 보면, 그 유리병에 담긴 술은 위스키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해요. 왜냐하면 구한말 시절 위스키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등에서 만든 게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서 넘어왔는데, 워낙 비싸고 귀해서 황실 연회나 고관대작들의 잔치 아니면 최고급 요리집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개다리소반에 놓고 즐기던 술은 아니었다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비싸고 귀한 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위스키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갈망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더 커지게 되는데요. 여기에는 다소 엉뚱하고 특별한 이유도 있었어요. 왜냐면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하면서도 의료용 위스키 만큼은 허용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 위스키는 오랜 세월 약으로 통용됐어요. 그래서 당시에 이런 얘기가 식민지 조선에까지 퍼졌는데, 그 시절 신문에는 위스키가 소화에도 좋고 식욕도 증진하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 온갖 질병까지 막아준다는 광고가 개재되기도 했고요. 1920년에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미국에서 악감, 즉 악성 감기가 유행하는데 위스키가 효험이 있더라는 기사도 실려요.

이렇게 위스키가 약이라는 풍문까지 돌다 보니까 찾는 이들은 더 늘어나게 됐는데, 문제는 스코틀랜드 같은 데서 만든 진짜 위스키는 수입량도 좋고 비싸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거예요. 결국 식민지 조선인들은 1920년대부터 위스키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진짜 위스키는 아니었고, 주정에 색과 향만 입힌 가짜 위스키였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짜 위스키 생산량이 어마어마했다는 건데요. 1922년 동화일보 기사를 보면, 전년도인 1921년 경성에서 제조된 위스키가 모두 11206석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리터로 환산하면 대략 2017000리터에 달하는데, 이 정도면 현재 스코틀랜드 아일라 보모어 증류소의 연간 스피릿 생산량에 거의 맞먹거든요.

어쨌든 가짜도 잘 팔릴 만큼 위스키 인기가 높다 보니까, 이때는 황당한 사기 사건도 끊이지가 않았는데요. 예를 들어 1927년 동아일보에는 위스키 6병을 왕창 깎아 준다고 해서 460전을 주고 사왔더니 맥다(보리차)’였다라는 기사가 실렸고, 아예 맹물에 노란 물감을 타서 위스키라고 속여서 팔거나, 좀 더 정교한 사기꾼은 물에 주정을 타서 술맛이 나게 한 다음에 색깔을 입히고 스콧치(스카치)’ 위스키 상표까지 붙여서 팔기도 했습니다.

밀주 마시고 사람이 죽었다라는 기사 본 적 있으시죠? 2019년 인도에선 92명이 떼죽음을 당했고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멕시코에서도 불량 밀주 때문에 100명 넘게 숨졌다는 기사가 보도 됐는데요. 식용 가능한 에탄올이 아니라 공업용 알코올이라 부르는 메탄올이 술에 섞여 들어갔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해방 이후 미군정 시절이던 194794, 서울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종로에 있는 태서관이라는 요리집에서 4명이 청주를 마신 뒤에 급사한 건데요. 문제의 청주를 만든 이 회사 대체 어디였냐? 바로 그 시절에 엄청난 인기를 끈 고래표 위스키를 생산하던 해림이라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언론에서는 해림을 독주의 집이라고 부르고, 해림이 만들던 고래표 위스키도 살인주라고 명명했는데요. 이런 사건은 이후에도 계속 벌어집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종로에 있는 평양관이란 요리집에서 빅토리라는 상표에 위스키를 마신 손님 1명이 숨지고 2명이 중태에 빠졌는데요.

이렇게 살인주 사건까지 있다는데도, 가짜 위스키 인기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고 잘 팔렸다고 해요. 그래서 미 군 정 시기에는 앞서 언급한 고래표나 빅토리 말고도 스타 위스키, 뉴스타 위스키, 올림픽 휘스키 같은 게 인기를 끌었고, 한국 전쟁이 끝난 뒤에는 마도로스 위스키, 박커스 위스키, 럭키 쎄분 위스키 같은 가짜 위스키가 잘 팔렸다고 하는데, 이름도 하나같이 참 독특하죠.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가짜 위스키의 끝판왕이 나타났으니, 그게 최백호 선생님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에도 등장하는 그 유명한 '도라지 위스키'였어요.